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우들 융에 (문단 편집) === 히틀러의 비서가 되다 === 1942년 12월, 히틀러의 측근이자 그의 4명의 개인비서중 한명이었던 알베르토 보어만[* 히틀러의 비서인 일명 '''갈색의 배후자''' [[마르틴 보어만]]의 동생. 형이나 동생이나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서로 끊임없는 암투를 거듭했다.]과 알게된 그녀는 히틀러의 여비서인 게르다 크리스티안이 결혼을 하면서 6개월간의 장기 휴가를 떠나게 되자 [* 1913~1997. 국방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가 공군 소령과 결혼하면서 장기 휴가를 신청했다. 1943년 복귀를 했고 이후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벙커에 탈출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미군에 넘겨지게 되었다. 전후에는 이혼하고 호텔에서 일하다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 암으로 사망했다.]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[[동프로이센]]의 라스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스샨체(Wolfsschanze)[* 늑대소굴이라는 뜻. [[발키리 작전]]이 벌어진 장소로도 유명하다.]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무용수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[* 이때까지 그녀는 비서는 임시로 하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.] 히틀러의 비서직을 수행하게 된다. 이때를 회상하며 그녀는 "히틀러의 비서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고작 22살이었고, 나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."라고 했다. || [[파일:external/cdn2.spiegel.de/image-631129-galleryV9-sijp-631129.jpg]] || 히틀러의 비서로 있던 1943년 7월 14일 히틀러의 [[전속부관]]들 중 한 명인 한스 융에(Hans Junge) [[나치 친위대|SS]] [[대위]]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. 1년 후에 한스 융에가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 때 전장에 투입되어 전사했기 때문이다. 융에 대위와 결혼을 준비할 때, 당시 독일 [[민법]]상 SS [[장병]]과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인종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을 포함한 수십 통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히틀러에게 슬적 "이렇게 복잡해선 결혼도 못하겠다"고 투덜대자 히틀러가 웃으며 전화 한 통으로 서류 제출을 일체 면제해준 일화가 있다. 이후 [[베를린]]으로 연합군의 총공세가 이어지며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[[베를린]] 총통관저의 [[퓌러붕커]]에서 [[히틀러]]의 유언장을 작성했다. [[https://m.blog.naver.com/freeman46/221393751616|융에가 직접 작성한 그의 유언장을 보려면 여기로]]. 그리고 1945년 4월 30일, 15:00경 히틀러와 [[에바 브라운]]이 자살한 이후[* 이때 그녀는 옆방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6명의 자식들과 식사 하는 중이었다.] 지하 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후 행적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. 하나는 융에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 처럼 연합국 지역으로 넘어가던 중 러시아 군에게 억류 되었는데 별탈없이 미군에 보내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과, 또 하나는 탈출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붙잡혀 [[강간]]을 당하고 부상을 당한 그녀를 치료한 후 소련군 장교에게 보내져 수개월간 그녀를 [[성노예|현지 종군처]]로 데리고 있었다는 설이다. 자세한 내용은 [[http://khronika.tistory.com/14|해당 블로그]]를 참조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